줄거리
『고래별』은 전쟁 직후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소녀 ‘서정’의 이야기를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1950년대 후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가난과 불신이 만연한 시대. 서정은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잃고,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수상한 소년 ‘은해’를 만난다.
은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년이다. 비밀스럽고 예민하지만 동시에 서정에게 다가가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실하다. 둘은 서로의 삶 속으로 조금씩 발을 들이며, 상처를 들키고도 도망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정치적 혼란, 가족과의 이별, 검열된 언어 같은 시대적 폭력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래별』은 소녀와 소년의 성장기인 동시에, 역사의 한가운데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는 작품이다. 그림은 따뜻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균형 속에서 독자는 ‘상처받은 시대’와 ‘자라나는 마음’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등장인물
서정은 고단한 시대의 아이지만, 동시에 아주 단단한 인물이다. 그녀는 어른들보다 더 어른스럽고, 아이들보다 더 조용하다. 삶에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먼저 배웠고, 사랑을 믿지 않는 대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무너지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으로 가득하다.
은해는 말이 없지만, 표현이 풍부한 인물이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신 눈빛과 손짓, 행동으로 모든 걸 말한다. 그는 서정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법을 배우고, 서정 역시 은해에게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허락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언어 이전의 신뢰로 맺어진다. 그래서 더 뭉클하다.
그 외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군인, 선생님, 이웃 어른들, 전쟁 고아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사회적 그림자처럼 기능하면서도, 각각의 작은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냈던 ‘우리 모두’의 얼굴이다.
감상평
『고래별』을 읽는 내내 가슴이 조였다. 이 이야기는 전쟁을 말하지만 전쟁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얼굴, 눈빛, 침묵, 포옹 같은 작고 조용한 장면들로 시대의 상처를 말한다. 그래서 그 슬픔은 더 깊고, 그 따뜻함은 더 강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책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을 아주 잘 다룬다는 점이다.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는 장면들, 아무 이유 없이 같이 앉아 있는 시간들, 외롭다는 말을 대신하는 어색한 미소. 그런 장면들에서 나는 진짜 위로를 받았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였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을 견디던 우리들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그림의 힘이었다. 섬세한 수채화 느낌의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대신 전해준다. 서정의 눈빛, 은해의 손짓, 하늘의 색감 하나하나가 이 이야기의 문장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완성되는 복합적인 예술 작품이다.
『고래별』은 한 시대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이어지는 이야기다. 누구나 살아가는 데 지치고, 상처를 감추며 하루를 버티지만, 결국 우리가 다시 살아가는 힘은 관계에서 온다는 걸 말해주는 작품이다.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