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기억의 시간을 걷다』는 교통사고 이후 기억의 일부를 잃은 30대 여성 ‘해인’이 주인공이다. 해인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더듬어 가는 중이다. 다만 이 기억 상실은 단순히 시간을 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우고 싶어 했던 과거와 강제로 마주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퇴원 후 가족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 시간 연락을 끊었던 어머니와, 이제는 낯설기까지 한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였다. 해인은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것이 두렵고, 동시에 절박하다.
이야기는 해인의 시선과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해인은 과거 자신이 가족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잊고 싶었던 말들, 하지 못했던 고백, 그리고 회피해왔던 용서의 감정이 차오른다.
결국 이 소설은, 기억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해인은 점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기보다는 지금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이다.
등장인물
해인 – 소설의 중심 인물. 그는 과거를 잃어버린 후, 현재와 조우하면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어간다. 기억을 되찾는 것이 목표였지만, 결국 더 중요했던 건, 그 시간 동안 느낀 감정이 허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해인의 내면은 매우 섬세하고, 독자는 그의 감정을 따라가며 스스로의 마음과 마주하게 된다.
어머니 – 해인에게 상처를 남긴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애틋한 존재다. 말은 없지만 행동으로 딸을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세대의 모순과 슬픔이 묻어난다. 그녀는 이야기 내내 침묵하지만, 그 침묵이 해인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여동생 수인 – 해인과의 갈등이 깊었으나, 누구보다도 해인의 부재에 괴로워했다. 그녀는 상처를 말하지 않고 견디는 방식으로 살아왔으며, 해인의 귀환은 그녀에게도 화해와 자존감 회복의 기회가 된다.
두 자매의 대화는 짧지만, 감정의 진폭은 크다.
주변 인물들 – 의사, 친구, 과거의 연인 등이 간간히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는 해인이 기억과 감정 사이를 오갈 때 작은 거울처럼 기능한다. 누군가는 기억을 되살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인물들이 있어 해인의 변화가 더 또렷해진다.
감상평
『기억의 시간을 걷다』는 “기억이 인간을 만든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단순히 ‘기억 상실’이라는 장치를 서사적으로만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보다 더 중요한 건, 그 기억을 둘러싼 감정이라는 점을 아주 섬세하게 보여준다.
정세랑의 문장은 부드럽고 간결하다. 그러나 그 문장들 사이엔 늘 ‘멈칫’하는 숨이 있다. 특히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독자는 오히려 더 강렬한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가장 깊이 다가간 문장은 이랬다.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때 내 마음은 진짜였다는 걸 알아.”
이 한 문장은 이 책 전체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기억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기억보다 먼저 우리를 흔든다. 이 책은 그 감정이, 우리를 다시 사랑하게 하고, 다시 용서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기억의 시간을 걷다』는 상처 입은 기억, 회피했던 가족, 잃어버린 나의 감정을 다시 꺼내어 보게 만든다. 그 과정은 아프지만, 그 끝엔 반드시 온기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동안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조용히 붙들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