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체공녀 강주룡』은 박서련 작가가 1931년 경성(서울)에서 실제로 있었던 ‘평화시장 고공 농성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쓴 역사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인 ‘강주룡’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가 일제 강점기 속에서 노동자이자 여성,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삼중의 억압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외쳤는지를 문학적으로 복원해낸다.
이야기는 1931년, 평양에서 평범한 한 여성이었던 강주룡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 취업하지만, 노동 조건은 인간 이하이고 임금은 형편없다. 여자라는 이유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또 어린 나이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숱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지만 분명한 신념으로, 동료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시장 건물 옥상 위 간판 위로 올라가 100여 일이 넘는 고공 농성에 돌입한다. 체공녀 강주룡의 이름은 그렇게 언론을 타고 조선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이야기는 단지 투쟁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강주룡이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연대를 얻어가고, 가족과 동료 사이에서 고립되기도 하며,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따라간다.
작가는 단순한 전기식 서술을 지양하고, 강주룡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는 그녀의 외로움, 분노, 두려움, 결의, 그리고 인간적인 약함까지 모두 마주하게 된다. 강주룡은 영웅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 몸을 내던진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그녀의 투쟁이 완벽한 승리로 귀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가 던진 작은 외침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후 수많은 여성과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시간의 궤적 위에 서 있는 의미 있는 외침이 된다.
등장인물
소설의 중심에는 단연코 강주룡이 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창작된 이 인물은, 단순히 ‘투사’나 ‘운동가’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를 한 명의 딸이자 노동자, 친구, 여성으로서 그리며, 이 복잡한 정체성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또 서로를 끌어안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한다. 강주룡은 처음에는 용기가 부족했던 인물이다.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살아가려고 했고, 자신의 권리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우선시했던 소심한 노동자였다. 하지만 불합리한 구조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그녀는 점차 깨어나고, 마침내 스스로를 시대의 중심으로 내던지게 된다.
강주룡의 변화는 단순한 계몽이나 계기적 사건이 아닌, 수많은 일상적 모멸감과 소외, 타인의 눈빛, 동료의 침묵 같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축적된다. 그녀는 투쟁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옥상 위에서 맞는 비바람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거나 조롱할 때였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그 굳은 신념 속에도 작가는 약함과 흔들림을 집요하게 조명하여, 강주룡을 더욱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낸다.
주룡의 동료이자 친구인 옥희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이다. 옥희는 강주룡보다 먼저 현실에 적응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끓는 분노를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주룡의 투쟁을 말리면서도 끝내 곁을 지키며, 비판과 연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보여준다. 옥희는 누군가의 정의를 무조건 응원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인물이다.
또한, 강주룡의 행동을 취재하며 외부에 알리려는 신문기자 이기수, 투쟁을 모른 척하는 공장 관리자, 그녀를 감시하는 일본 경찰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에 현실감을 더한다. 이들은 모두 시대의 한 단면을 상징하며, 강주룡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의 결정이 얼마나 고립되고 외로운 것이었는지를 실감나게 만든다.
이처럼 『체공녀 강주룡』은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주룡은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공 위로 올라간 한 사람이며, 그 인간적 면모야말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부분이다.
감상평
『체공녀 강주룡』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나 스스로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권리들—일할 수 있는 권리, 정당한 임금, 존중받을 권리—그 모든 것들이 이토록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강주룡은 자신이 이 시대를 대표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대한 이념으로 똘똘 뭉친 투쟁가도 아니었다. 그저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침묵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한 사람이 옥상 위로 올라간 장면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작가는 실제 있었던 사건과 인물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단순한 복원이나 미화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강주룡의 심리를 끝까지 따라가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외칠 수 있을까?’ 소설 속 강주룡은 승리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공농성은 당대의 판을 바꿔놓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그 외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았다. 작가는 이 점을 강조하며,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의미는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외침’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이 작품은 페미니즘 소설로도 강한 울림을 준다.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강주룡은 삼중의 억압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한 역할로도 자신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 가치,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여성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야기는 분명히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이 점이 『체공녀 강주룡』을 오늘날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문장의 아름다움도 이 소설의 커다란 미덕이다. 박서련 작가는 단순한 묘사조차 단단하고 섬세하게 써내려간다. 그녀의 문장은 불필요하게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정제된 슬픔과 결기를 담고 있어, 강주룡의 숨결과 체온이 그대로 느껴진다.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서사로 독자의 마음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