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멸망의 왕’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소년과 개의 여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눈앞의 세계가 무너진 뒤에도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한 아이의 성장기이자, 동물과의 깊은 유대, 그리고 희망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세계가 전염병으로 인해 몰락한 이후의 한국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도시는 텅 비고,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더 이상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주인공 '지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한 마리 개를 만나게 된다. 평범한 개처럼 보이지만, 이 개는 특이하게도 인간처럼 이해하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멸망’이다.
지오와 멸망은 서로를 의지하며 무너진 도시를 함께 걷는다.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잊힌 군인, 기이한 신자, 무기력한 어른들—과의 관계를 통해 지오는 점점 더 사람답게, 단단하게 성장해 간다. 이 세계는 끝나버린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사랑하고, 꿈을 꾼다. 멸망이란 이름을 가진 개와 함께하면서, 지오는 그 안에 숨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무너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소설은 결코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끝내 사람다움을 지켜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
지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독자의 감정적 시선을 이끄는 인물이다. 어리지만 결코 약하지 않고, 두렵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어른들이 버리고 떠난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고, 그만큼 조숙해졌다. 하지만 멸망이라는 개를 만나면서부터, 그 안에 숨겨진 아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 함께 걷는 일, 그것이 지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점차 깨달아가는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뭉클한 부분이다.
멸망은 말이 없는 개지만, 그 어떤 인물보다도 강한 존재감을 발한다. 그는 소년을 보호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이끈다. 그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설정은 판타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멸망은 이 폐허 속에서 지오가 끝까지 사람으로 남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존재다. 그는 가족이자 친구이며, 조용한 구원이다.
그 외에도 짧게 스쳐가는 인물들이 인상 깊다. 포기해버린 어른들, 자신만을 지키려는 사람들, 과거에 사로잡힌 이들. 이들은 모두 무너진 세계 속에서 현실을 반영한다. 그 속에서 지오는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인물로 더욱 돋보인다. 이 인물들은 지오의 거울처럼 작용하며,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감상평
‘멸망의 왕’을 읽는 내내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분명 배경은 어둡고, 세계는 망가졌지만, 이야기는 끝없이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무너진 도심을 배경으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 아이와 개가 중심에 있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눈부실 줄은 몰랐다. 김호연 작가는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진짜 멸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마음이 꺼졌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멸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결국 희망의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 이름은 멸망이지만, 존재 자체는 구원이다. 그의 무언의 눈빛, 조용한 기다림, 끝까지 함께 걷는 걸음은 말보다 더 깊은 위로였다. 세상이 아무리 무너져도, 끝까지 함께 걷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멸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이 소설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전한다.
지오를 보며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어른이 없던 시기,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던 때, 나 역시 세상이 무너졌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고, 기다려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지오와 멸망의 관계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소설은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상처받은 모든 존재들을 위한, 아주 조용한 응원의 편지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아마 다시는 ‘멸망’이라는 단어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빛 하나를 찾고 있다면, ‘멸망의 왕’은 그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